이스터섬은 인간의 얼굴을 새긴 거대한 조각물인 모아이로 잘 알려져 있는 남태평양의 고도다. 이곳에는 문명이 있었지만 19세기 중반 섬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거의 완전히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환경 파괴로 자원이 고갈되면서 남겨진 자원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발, 섬 인구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게 이스터섬 역사의 그간 정설이다.

그런데 뉴욕주립대 빙엄턴캠퍼스 칼 리포(Carl Lipo) 교수 연구팀은 이를 부정하는 새로운 이론과 뒷받침할 증거를 발표해 눈길을 끈다.

이스터섬은 현지어로 라파누이라고 불린다. 이곳에는 5세기경 폴리네시아인이 이주하고 10세기경 유명한 석상 조각인 모아이 제작이 시작됐다. 일단 섬 인구는 3,000∼4,000명 혹은 1만 명 이상이라는 2가지 설이 있지만 실제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2016년 현재 주민은 4,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섬에는 칠레 해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공항과 도로, 항만 등 정비된 시가지에는 레스토랑과 호텔, 주유소와 학교, 병원, 박물관, 우체국, 방송국 같은 시설도 있다.

이렇게 현대적인 곳으로 변모했지만 모아이의 기원과 더불어서 이스터섬 원주민인 폴리네시아인 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문명 붕괴가 일어난 이유로 제기된 이론으로는 학자이자 작가인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주창한 에코사이드(ecocide), 생태계 파괴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비계획적인 개발로 산림 벌채를 하면서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숲은 마르고 삼림 벌채 탓에 양분을 포함한 토양이 흘러나와 음식을 재배할 수 없게 되면서 식량난으로 이어졌다는 것.

또 나무가 없어지면서 물고기를 낚시하는 장대를 만들 수조차 없게 됐고 바다로 둘러싸인 절해의 고도인 이스터섬에서 생활이 곤란해져 결국 남겨진 자원을 두고 전쟁을 벌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 파괴설은 무모한 개발과 환경 파괴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로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연구팀은 이런 환경 파괴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연구팀은 2000년경부터 모아이 제작 방법 등을 포함해 역사와 원주민 사회가 붕괴된 경위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앞서 밝혔듯 이스터섬에선 주민끼리 살인을 벌인 간주해왔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진 건 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물체다. 섬에서 채취한 흑요석으로 만든 이 물체는 마타아(mata'a)라고 불린다. 날카롭고 예리한 형상 때문에 주민끼리 살인에 사용된 것으로 여긴 것이다.

1774년 이곳을 찾은 제임스 쿡 일행은 섬에 얇고 날카롭게 가공된 창 같은 게 널려 있었다고 적고 있다. 연구팀은 마타아의 모양을 분석했다. 물체 형상을 X축과 Y축으로 분해해 수치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기술을 이용해 마타아 400여 개를 조사한 결과 마타아는 사람을 죽일 목적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람에게 치명상을 줄 뿐 날카로움이나 긴 길이가 없다는 게 이유지만 형상을 바탕으로 연구팀은 마타아가 껍질을 벗기는 등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던 도구라고 결론을 내고 전쟁을 위해 사용된 게 아니라는 설을 제기한 것이다.

연구팀은 대신 18세기경 섬을 방문한 유럽인에 의해 초래된 질병이 인구를 격감시켰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스터섬에 온 첫 유럽인은 1722년 부활절 이 섬을 발견한 네덜란드 해군 제독인 야코프 로헤베인이다. 당시 섬에는 3,000명 가량 주민이 살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야코프 로헤베인 제독 이후 유럽에서 배가 섬에 오기 시작한다. 1774년 이스터섬에 상륙한 쿡 선장 일행은 섬을 가로질러 해골이 덮여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몇 년 전에 떼죽음이 일어난 것이다.



연구팀은 그 무렵 이스터섬을 방문했던 스페인에서 온 배로 인해 재앙이 초래됐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천연두와 전염병 등 질병에 전염, 섬 인구가 단기간에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지적한다. 연구팀은 유럽인이 오기 전까지 섬에서 대규모 인구 파괴가 일어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 설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높다. 화전 농업에 의한 환경 파괴 영향이 과소 평가되는 것 같은 문제를 지적하거나 당시 해골에 남아있는 외상 흔적과 섬에 전해지는 대학살 전설의 존재를 지적하면서 주민끼리의 살인이 원인이라고 반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섬 거주자는 대부분은 돌아온 사람이나 외부에서 유입된 인구인 만큼 이런 전설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구팀은 또 모아이 제작 방법에 대한 조사도 실시하고 있다. 영상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모아이가 걷는 방법, 운반하는 방법을 재현한 걸 볼 수 있다. 검증에 사용한 콘크리트 재질 모아이 모형은 무게가 5톤이다. 모아이 삼면에 밧줄을 걸고 좌우로 흔들어서 마치 모아이가 실제로 걷는 것처럼 운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석원 기자  lswcap@techhol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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